EPISODE 1: 샘 포터 브리지스
"샘 포터 브리지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깨어났네, 샘. 샘 포터 브리지스.”
샘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타임폴을 피해 근처 동굴로 몸을 숨겼고, 짐을 내려놓은 채 잠깐 눈을 붙였던 모양이었다. 아마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미안해.”
여자가 사과했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녀는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 고무 슈트로 목 아래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샘의 질문에 여자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랑 마찬가지야. 비를 피해 들어왔지. 하지만 이제 타임폴은 멈춘 것 같네.”
동굴 밖을 보니 정말로 타임폴은 그친 듯했다. 옅은 구름 사이로 약한 햇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깨어나기 전에, 비는 지나간 듯했다.
“내 이름은 프래자일.”
여자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 역시 검은 장갑에 싸여 있었다.
샘은 무의식중에 얼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악의는 없었다. 단지 서둘러야 했을 뿐. 악수하지 못한 어색함을 감추려,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들었다.
그녀 슈트에 그려진 마크는 익숙했다. 뼈로 된 손바닥이 짐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도안이었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
“그래? 영광인데.”
프래자일이라 밝힌 여자가 휘파람 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당신을 잘 알고 있어. 샘 포터 브리지스── 전설적인 배달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짐을 정리했다. 어차피 이 여자도,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아닐 테니까.
“먹을래?”
프래자일이 불쑥 손을 내밀며 샘 얼굴 앞에 벌레 같은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크립토바이트야. 타임폴에도 면역이 생기지.”
애벌레처럼 생긴 그것을 살아 있는 채로 입에 던져 넣었다. 씹는 소리는 짐승이 고기를 뜯는 듯한 느낌을 줬다. 샘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있잖아, 우리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
프래자일은 평범한 여성의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혼자선 힘들잖아?”
“프래자일 익스프레스라면 인력은 충분할 텐데?”
프래자일 익스프레스는 대륙 중부에서 활동하는 배달 조직이었다.
국가가 붕괴된 직후 자발적으로 움직이며 피해자들에게 물자를 전달하고 복구를 돕는 데 헌신한 조직 중 하나.
샘처럼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가 아닌, 사람과 자원이 풍부한 체계적인 네트워크로 이 세계를 지탱해왔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지금, 그런 배달 조직은 더없이 중요한 존재였다.
“동료들에게 배신당했어. 대부분 돌아섰지. 내 조직은 이제 붕괴 직전이야. 게다가──”
그녀는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그 손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주름과 검버섯으로 뒤덮인,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그 손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손이었다.
“목 아래는 타임폴에 망가졌어. 내 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상태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보았다. 눈물이 고인 듯 보였지만, 눈가와 입가는 젊은 그대로였다.
아마도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고무 슈트 아래 감춰진 피부만이 타임폴에 의해 늙어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든,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것들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
“나는 물건을 나르는 게 내 일이야.”
프래자일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무전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여기는 브리지스 배달 센터. 샘 포터 브리지스, 들립니까? 계약 의뢰자 샘 포터. 수령인이 대기 중입니다〉 샘의 무전기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때가 된 것이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샘은 짐을 다시 짊어지며, 말없이 그 사실을 전하려 했다.
“도시까지 가는 거구나.”
프래자일도 작고 가벼운 짐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어느새 우산이 들려 있었는데, 둥근 형태가 아니라 별처럼 뾰족한 모양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놈들을 조심해.”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굴을 나섰다.
그 순간, 가슴 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급히 주워 들려던 샘의 등 뒤로, 프래자일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타임폴은 닿는 모든 것의 시간을 앗아가.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않아. 과거란… 버릴 수 없는 거잖아. 그치?”
샘은 종잇조각을 그녀의 시선에서 감추듯 움켜쥐었다. 오래된 사진이었다. 지금보다 젊은 샘과 두 명의 여자가 함께 찍혀 있었다.
어딘가 당황한 표정의 샘, 그리고 미소 짓는 여자.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은 희미하게 번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샘은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버릴 수도 없고, 되찾을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다시 만나자. 샘 포터 브리지스.” 사진을 접어 주머니에 넣은 샘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센트럴 노트 시티
그 남자는 이고르 프랑크 눈앞에서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마를 가로지른 봉합 자국과 붉은 재킷의 광택이 아직도 망막에 남아 있었다. 환상이라는 건 알지만, 그 남자의 체온과 땀 냄새가 여전히 주변에 감돌고 있는 듯했다.
광학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남자의 존재감은 그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는 확실히 그곳에서 숨 쉬며 이고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명령을 전했다.
마치 실제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의 코드네임이 '데드맨'이라는 사실은, 꽤나 아이러니했다.
센트럴 노트시티 지하에 마련된 개인실 문을 닫고, 이고르는 인적 없는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데드맨의 홀로그램이 나타난 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주거 구역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빨간 재킷의 옷깃을 고쳐 입으며 데드맨은 그렇게 말했다. 어조는 차분했지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고르. 발견이 늦었어. 사망 후 거의 40시간이 지났지. 긴급 사태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데드맨은 고개를 숙였다. 이마의 수술 자국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네가 제2차 원정대 멤버고, 그 준비 중이란 건 본부도 알고 있어. 이게 시체 처리반으로서 네 마지막 임무가 될 거야. 그리고──〉
‘알고 있어.’ 이고르는 눈빛으로 데드맨을 제지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여유는 몇 시간뿐. 시체 처리반 인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고르가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이 도시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모터 소음과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왼쪽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이고르는 못 본 척하며 트럭을 하역 게이트 앞에 멈추도록 지시했다.
이 운전사와는 여러 차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격리 병동에서 소각장까지 시체를 운반하는 일이다.
한 번 실수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할 수 있는 일.
벼랑에 걸린 줄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지만, 평소라면 치명적인 사태를 막을 시간적 여유는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시간이 없다. 멈출 수 없다.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뜻했다.
트럭이 속도를 줄였다. 앞유리를 통해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역광 탓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풍채는 자료에서 본 그 남자와 일치했다.
이고르는 트럭을 멈추고 차체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그림자와 눈길이 교차했다. 이마 사이에 깊은 주름이 살짝 잡혔다.
차체에 새겨진 브리지스 마크를 본 탓이라고, 이고르는 확신했다.
즉, 저 인물이 바로 이번 위기를 구해줄 구세주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몇 발자국 나아가 오른손을 내민다.
“난 이고르. 브리지스의 시체 처리반이야.”
구세주라 불릴 이 남자는, 이고르의 내민 손을 외면했다.
그렇군, 하고 수긍하면서도, 이고르는 손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샘 포터지?”
빛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눈부신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고르는 그 표정이 긍정이라는 걸 알아챘다.
샘 포터 브리지스. '둠스' 능력을 가진 프리랜서 배달부.
10년 전까지 브리지스에 소속되어 있었고, 당시부터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접촉공포증을 보였다.
이고르는 자료에 적혀 있던 샘의 특이 사항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악수는 거절했지만, 샘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
“시간이 없어. 따라와 줘.”
그렇게 말하며 이고르는 트럭의 화물칸으로 향했다. 뒤에서 발소리가 따랐다.
“이걸 봐줘.”
화물칸에 올라선 이고르는 가운데 고정된 짐을 가리켰다.
성인 남성 키만큼 크고 납빛을 띤, 곤충의 번데기 같은 물체가 있었다.
시체 가방에 싸인 시신이었다.
“이걸 소각장까지 운반하고 싶어.”
화물칸에 오른 샘은 대답 대신 몸을 낮추고 시체 가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숨이 멎은 지가 얼마나 됐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샘이 물었다. 그 말투에서 이 상황의 특수성과 긴급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40시간쯤 됐어.”
샘이 얼굴을 들고 시선을 마주쳤다.
“격리 시설에 보관하지 않은거야?”
분노인지, 혼란인지 모를 샘의 목소리를 이고르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병사한 게 아니야. 자살했어.”
데드맨이 보낸 자료에 적혀 있던 사실을 전하며, 이고르는 다시금 그 충격에 짓눌렸다.
“자살했다고?”
샘은 그렇게 중얼이며 시체 가방을 응시했다.
“발견까지 시간이 걸렸어. 냉각 처리는 했지만, 언제 네크로화 될지는 몰라.”
샘에게 설명하며, 이고르는 점점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죽은 뒤 네크로화 까지 이르는 것은, 스스로를 궁극의 파괴 병기로 만드는 것과 같다.
죽음의 개념을 모르는 갓난아기를 제외하면,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살은 결코 혼자 삶을 끝내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타인을 함께 끌고 가는 일이다.
결국 자살은 테러 행위와 다름없다.
“소각장은 어디를 쓰게?”
샘의 질문은 이고르를 몰아붙이는 듯했다.
그 기세를 떨쳐내듯, 이고르는 손목 장치의 전원을 켰고 공중에 지도가 떠올랐다.
“가장 가까운 곳은 북쪽이야.”
두 사람의 위치와 함께 시체 소각장이 지도에 나타났다. 그것을 들여다본 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경로엔 놈들이 배회하고 있어. 다른 곳은 안 돼?”
“시간이 없어.”
이고르는 샘의 제안을 잘라냈다. 이 모든 건 시신 발견이 늦은 탓이다.
“그럼 여기서 태우는 게 더 안전하겠지.”
“이 근처에서 태울 순 없어. 카이랄리움이 도시에 피해를 줄 거야.”
이고르는 뒤편의 도시를 돌아봤다. 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시체의 끝자락, 즉 '놈들'이 몰려 있는 루트를 돌파하기보단, 지금 여기서 시신을 태우는 편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태운 시신에서 퍼져나오는 카이랄리움은 오랫동안 이곳에 남아 생존자들에게 악영향을 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도시의 입구다.
결국 이곳은 폐쇄될 것이고, 도시와 외부를 잇는 소중한 연결선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 같은 능력자가 동행해 주었으면 해”
이고르의 간청에 대한 대답으로, 샘은 말없이 장갑을 벗고 시신 가방에 맨손을 댔다.
손등에서 손목까지의 피부가 붉게 변색되고, 모든 모공이 닫혀 갔다.
이것이 바로 능력자가 죽음을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아마도 슈트 속에 가려진 팔 역시 소름이 돋고, 붉은빛이 도는 어둠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샘은 손을 떼고 얼굴을 시신 가방 가까이 들이댔다.
시체가 내뿜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다.
이마 중앙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네크로화의 초기 단계야. 서둘러야 해. 안 그러면 여기가 날아가.”
즉,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샘, 같이 가줄 수 있겠나.”
시체 위에 몸을 기댔던 샘은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고르는 다시 한 번 오른손을 내밀었다.
“브리지스와의 계약 성립이다. 샘 포터 브리지스.”
하지만 샘은 그 손을 흘끗 보기만 한 채, 다시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죽은 자에겐 손을 댈 수 있어도, 산 자와의 악수는 할 수 없는 걸까.
이고르는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냥 샘이야. 샘이라 불러.”
샘은 시신을 고정하는 벨트를 다시 조이기 시작했다.
이고르도 무릎을 꿇고 그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난 놈들이 보이지 않아. 느껴질 뿐이야.”
샘은 시체의 발목을 고정한 뒤, 조용히 되뇌듯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그것도 자료에 명시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나 같은 인간은 감지조차 할 수 없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접속해주는 장비 없이는,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고르는 자신의 가슴에 부착된 장비를 툭 치며 샘에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걸 데려왔지.”
“브리지 베이비(BB) 군.”
“너와 얘만 있으면, 놈들을 잘 피할 수 있을 거야.”
절반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이고르는 자신의 복부에서 나온 케이블을 들고 포드의 단자에 연결했다.
순간, 세계가 뒤집혔다.
미저골에서 정수리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솟구쳤다.
시야가 이상하게 뒤틀려 보이는 건, 흘러나온 눈물 탓이었다.
샘의 얼굴이 마치 추상화처럼 뒤틀려 보였다.
그 누구도 그 원리나 기원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장비.
이 세계가 지금 같은 모습이 된 즈음에 탄생한 시스템.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아기, 브리지 베이비의 형상을 한,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비.
브리지 베이비가 이고르의 가슴 포드 안에서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포드를 채운 인공 양수 속에서 기포가 터지고 퍼졌다.
“기분 좋은 체험은 아니군.”
눈물을 닦고 콧물을 들이마시며 샘을 바라봤다.
“그래, 저승과 연결되는 거니까.”
샘의 말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오감이 아직 제대로 동기화되지 않은 탓이었다.
시야도 아직 불안정했다. 눈을 감고 눈꺼풀을 비볐다.
귓속 어딘가에서 브리지 베이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그 웃음소리에 반응해 눈을 뜬 이고르의 시야에, 굳은 표정의 샘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가슴의 포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브리지 베이비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출발해!”
이고르는 운전석 쪽으로 외쳤다.
남은 시간은 이제 거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시신을, 이 세계의 규칙에 따라 정확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시신을 죽은 자들의 세계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모터가 빠르게 회전하며, 트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역 게이트를 빠져나가자, 그 너머 하늘엔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짙은 먹구름이 이고르와 샘, 그리고 화물칸의 시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 단말기를 켜고, 이고르는 트럭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안심할 순 없지만, 이대로 간다면 간신히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땐, 세상이 이렇진 않았어.”
화물칸 기둥을 붙잡고 이고르는 샘에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라도 말하지 않으면 불안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있었고, 누구나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지. 너 같은 '배달부'는 없었어.”
샘은 멀리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고르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고속도로도 있었고, 비행기도 떴지. 다른 나라로도 갈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전부 박살났어. 데스 스트랜딩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투성이가 됐고, 운 좋게 남은 것들도 타임폴 덕분에 다 녹아버렸지.”
고속도로, 비행기, 외국, 그리고 아메리카.
단어들은 남아 있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던 실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앞으로는, 말조차도 사라질 것이다.
사물이 사라지고, 그 뒤를 따라 말도 사라진다.
색의 이름, 동물의 이름, 음식의 이름, 탈것의 이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며 생겨나는 감정의 이름들까지… 점점 사라져 간다.
운 좋게 남아있더라도, 그것들은 이제 현실감 없는 성스러운 껍데기일 뿐이겠지. 예컨대 ‘신’처럼.
지금의 아메리카는 거의 신과 같은 말이 되어가고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샘처럼 아메리카가 사라진 뒤에 태어난 세대가 다수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메리카는 신과 똑같다. 이름만 남고, 나머진 신앙의 영역이 된다.
광신으로 변질된 국가는, 무의미한 비극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래서야말로, 아메리카를 아는 우리가 그걸 되찾아야 한다.
아메리카가 신이 되기 전에. 타임폴이 전부 녹여버리기 전에. 괴물들이 이 세상을 지워버리기 전에.
“아메리카가 녹아버린 자리에, 해변에서 괴물이 올라왔지. 너한텐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고르는 후회하며 샘을 바라봤다.
그러나 샘의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이고르의 말문을 풀게 했다.
“이 세상은 이제 저승과 연결돼 있어.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시 안에 틀어박혔지. 그래서 너 같은 '배달부'들이 귀한 거야.”
‘나 같은 시체 처리반도 그렇고 말이지──’라는 말은 삼켜버렸다.
아니,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앞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으니까.
땅에서 하늘로 뻗은 게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거꾸로 내려오는 아치. 거꾸로 뒤집힌 무지개였다.
저승에서 괴물들이 건너오는 불길한 다리.
“저걸 봐!”
이고르가 뒤집힌 무지개를 가리켰다. 샘도 이미 눈치챘는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시선은 트럭 적재함의 시신 자루로 향했다. 이고르도 따라갔다.
무딘 납빛의 시신 자루 곳곳에서, 검은 타르처럼 끈적한 액체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특히 커다란 얼룩이 진 부위는 시체의 아랫배 쪽이었다. 이고르의 귓가에서 BB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또다시 시야가 뒤틀렸다. 커다란 검은 반점에서 수많은 미세한 입자들이 태어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입자들은 각각 나선형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었고, 그것들이 서로 꼬여 하나의 굵은 밧줄을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육체가 네크로화하면서, 그곳에서 빠져나온 혼이 해변으로 끌려가려 하고 있었다.
해변은 죽은 자의 세계와 살아 있는 자의 세계를 이어주는 장소를 뜻한다.
단, 그것은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위상 속에 존재하는 특수한 '장소'로 설명된다.
이고르 같은 일반인은 감지조차 불가능하지만, 능력자는 이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설명할 때 종종 죽은 자의 세계를 '바다'로 비유하고,
그 바다와 이 세상을 잇는 장소를 '비치, 즉 해변이'라 표현했기에, '해변'라는 명칭이 굳어졌다.
생명의 근원이라 여겨지던 바다는, 이제 죽은 자들이 돌아가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죽은 자가 비치를 거쳐 이 세계로 밀려드는 현상은
'죽음의 좌초, 데스 스트랜딩'이라 불리게 되었다.
샘이 시신 위에 손을 내밀었다. 밧줄이 생겨나고 있는 아랫배──정확히 배꼽 부위에 손이 닿는다.
손등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한다.
“소각장까지 얼마나 남았지?”
샘이 외쳤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시신 자루는 거의 전면이 검게 물든 얼룩으로 덮여 있다.
그 검은색에 반응하듯, 하늘도 점점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곧 튀어나올 거야!”
“어쩔 수 없군. 놈들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
이고르는 리어윈도우를 두드리며 운전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트럭은 속도를 높이며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적재함의 기둥을 다시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그로 인해 시신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네크로시스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신을 운반해왔지만,
대부분은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던, 비교적 안전한 시신들이었다.
말기 치료를 받던 환자를 격리병동에서 옮기는 일이 많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라 하더라도, 네크로화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절박한 운반은 처음이었다.
이 자루 아래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육체는 이미 미세한 입자로 끝없이 분해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나마 윤곽을 유지해주는 건, 이 시신 자루 하나뿐.
화학 섬유로 짜인 부드러운 관.
그 결속이 풀리는 순간, 이건 더 이상 시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트럭이 크게 튀어 오르자, 이고르와 샘은 기둥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뒤쪽에서 대지를 휘젓는 바람이 불어오며 적재함의 두 사람을 덮쳤다.
날아든 모래 먼지에 눈을 감은 이고르의 뺨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피부가 당긴다. 아픔도, 가려움도 아닌 이상한 감각이 얼굴 전체로 퍼져간다.
또 나이를 먹은 걸까. 흰머리와 주름이 다시 늘었을 것이다.
내리기 시작한 타임폴에 반응해, 유니폼의 후드가 자동으로 펼쳐지며 이고르의 머리를 덮었다.
마주 선 샘 역시 머리에 후드를 쓴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장비를 비웃듯, 타임폴은 점점 거세졌다.
(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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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샘 포터 브리지스
"샘 포터 브리지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엔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깨어났네, 샘. 샘 포터 브리지스.”
샘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타임폴을 피해 근처 동굴로 몸을 숨겼고, 짐을 내려놓은 채 잠깐 눈을 붙였던 모양이었다. 아마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미안해.”
여자가 사과했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녀는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 고무 슈트로 목 아래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샘의 질문에 여자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랑 마찬가지야. 비를 피해 들어왔지. 하지만 이제 타임폴은 멈춘 것 같네.”
동굴 밖을 보니 정말로 타임폴은 그친 듯했다. 옅은 구름 사이로 약한 햇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깨어나기 전에, 비는 지나간 듯했다.
“내 이름은 프래자일.”
여자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 역시 검은 장갑에 싸여 있었다.
샘은 무의식중에 얼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악의는 없었다. 단지 서둘러야 했을 뿐. 악수하지 못한 어색함을 감추려,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들었다.
그녀 슈트에 그려진 마크는 익숙했다. 뼈로 된 손바닥이 짐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도안이었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
“그래? 영광인데.”
프래자일이라 밝힌 여자가 휘파람 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당신을 잘 알고 있어. 샘 포터 브리지스── 전설적인 배달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짐을 정리했다. 어차피 이 여자도,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아닐 테니까.
“먹을래?”
프래자일이 불쑥 손을 내밀며 샘 얼굴 앞에 벌레 같은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크립토바이트야. 타임폴에도 면역이 생기지.”
애벌레처럼 생긴 그것을 살아 있는 채로 입에 던져 넣었다. 씹는 소리는 짐승이 고기를 뜯는 듯한 느낌을 줬다. 샘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있잖아, 우리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
프래자일은 평범한 여성의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혼자선 힘들잖아?”
“프래자일 익스프레스라면 인력은 충분할 텐데?”
프래자일 익스프레스는 대륙 중부에서 활동하는 배달 조직이었다.
국가가 붕괴된 직후 자발적으로 움직이며 피해자들에게 물자를 전달하고 복구를 돕는 데 헌신한 조직 중 하나.
샘처럼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가 아닌, 사람과 자원이 풍부한 체계적인 네트워크로 이 세계를 지탱해왔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지금, 그런 배달 조직은 더없이 중요한 존재였다.
“동료들에게 배신당했어. 대부분 돌아섰지. 내 조직은 이제 붕괴 직전이야. 게다가──”
그녀는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그 손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주름과 검버섯으로 뒤덮인,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그 손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손이었다.
“목 아래는 타임폴에 망가졌어. 내 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상태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바라보았다. 눈물이 고인 듯 보였지만, 눈가와 입가는 젊은 그대로였다.
아마도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고무 슈트 아래 감춰진 피부만이 타임폴에 의해 늙어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든,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것들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
“나는 물건을 나르는 게 내 일이야.”
프래자일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무전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여기는 브리지스 배달 센터. 샘 포터 브리지스, 들립니까? 계약 의뢰자 샘 포터. 수령인이 대기 중입니다〉 샘의 무전기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때가 된 것이다. 이제 움직여야 했다. 샘은 짐을 다시 짊어지며, 말없이 그 사실을 전하려 했다.
“도시까지 가는 거구나.”
프래자일도 작고 가벼운 짐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어느새 우산이 들려 있었는데, 둥근 형태가 아니라 별처럼 뾰족한 모양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놈들을 조심해.”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굴을 나섰다.
그 순간, 가슴 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급히 주워 들려던 샘의 등 뒤로, 프래자일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타임폴은 닿는 모든 것의 시간을 앗아가.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않아. 과거란… 버릴 수 없는 거잖아. 그치?”
샘은 종잇조각을 그녀의 시선에서 감추듯 움켜쥐었다. 오래된 사진이었다. 지금보다 젊은 샘과 두 명의 여자가 함께 찍혀 있었다.
어딘가 당황한 표정의 샘, 그리고 미소 짓는 여자.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은 희미하게 번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샘은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버릴 수도 없고, 되찾을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다시 만나자. 샘 포터 브리지스.” 사진을 접어 주머니에 넣은 샘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센트럴 노트 시티
그 남자는 이고르 프랑크 눈앞에서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마를 가로지른 봉합 자국과 붉은 재킷의 광택이 아직도 망막에 남아 있었다. 환상이라는 건 알지만, 그 남자의 체온과 땀 냄새가 여전히 주변에 감돌고 있는 듯했다.
광학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남자의 존재감은 그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는 확실히 그곳에서 숨 쉬며 이고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명령을 전했다.
마치 실제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의 코드네임이 '데드맨'이라는 사실은, 꽤나 아이러니했다.
센트럴 노트시티 지하에 마련된 개인실 문을 닫고, 이고르는 인적 없는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데드맨의 홀로그램이 나타난 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주거 구역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빨간 재킷의 옷깃을 고쳐 입으며 데드맨은 그렇게 말했다. 어조는 차분했지만,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고르. 발견이 늦었어. 사망 후 거의 40시간이 지났지. 긴급 사태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데드맨은 고개를 숙였다. 이마의 수술 자국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네가 제2차 원정대 멤버고, 그 준비 중이란 건 본부도 알고 있어. 이게 시체 처리반으로서 네 마지막 임무가 될 거야. 그리고──〉
‘알고 있어.’ 이고르는 눈빛으로 데드맨을 제지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여유는 몇 시간뿐. 시체 처리반 인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고르가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이 도시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모터 소음과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왼쪽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목덜미의 땀을 훔쳤다.
이고르는 못 본 척하며 트럭을 하역 게이트 앞에 멈추도록 지시했다.
이 운전사와는 여러 차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격리 병동에서 소각장까지 시체를 운반하는 일이다.
한 번 실수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말려들게 할 수 있는 일.
벼랑에 걸린 줄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지만, 평소라면 치명적인 사태를 막을 시간적 여유는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시간이 없다. 멈출 수 없다.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뜻했다.
트럭이 속도를 줄였다. 앞유리를 통해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역광 탓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풍채는 자료에서 본 그 남자와 일치했다.
이고르는 트럭을 멈추고 차체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그림자와 눈길이 교차했다. 이마 사이에 깊은 주름이 살짝 잡혔다.
차체에 새겨진 브리지스 마크를 본 탓이라고, 이고르는 확신했다.
즉, 저 인물이 바로 이번 위기를 구해줄 구세주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몇 발자국 나아가 오른손을 내민다.
“난 이고르. 브리지스의 시체 처리반이야.”
구세주라 불릴 이 남자는, 이고르의 내민 손을 외면했다.
그렇군, 하고 수긍하면서도, 이고르는 손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샘 포터지?”
빛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눈부신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고르는 그 표정이 긍정이라는 걸 알아챘다.
샘 포터 브리지스. '둠스' 능력을 가진 프리랜서 배달부.
10년 전까지 브리지스에 소속되어 있었고, 당시부터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접촉공포증을 보였다.
이고르는 자료에 적혀 있던 샘의 특이 사항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악수는 거절했지만, 샘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물었다.
“시간이 없어. 따라와 줘.”
그렇게 말하며 이고르는 트럭의 화물칸으로 향했다. 뒤에서 발소리가 따랐다.
“이걸 봐줘.”
화물칸에 올라선 이고르는 가운데 고정된 짐을 가리켰다.
성인 남성 키만큼 크고 납빛을 띤, 곤충의 번데기 같은 물체가 있었다.
시체 가방에 싸인 시신이었다.
“이걸 소각장까지 운반하고 싶어.”
화물칸에 오른 샘은 대답 대신 몸을 낮추고 시체 가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숨이 멎은 지가 얼마나 됐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샘이 물었다. 그 말투에서 이 상황의 특수성과 긴급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40시간쯤 됐어.”
샘이 얼굴을 들고 시선을 마주쳤다.
“격리 시설에 보관하지 않은거야?”
분노인지, 혼란인지 모를 샘의 목소리를 이고르는 조용히 받아들였다.
“병사한 게 아니야. 자살했어.”
데드맨이 보낸 자료에 적혀 있던 사실을 전하며, 이고르는 다시금 그 충격에 짓눌렸다.
“자살했다고?”
샘은 그렇게 중얼이며 시체 가방을 응시했다.
“발견까지 시간이 걸렸어. 냉각 처리는 했지만, 언제 네크로화 될지는 몰라.”
샘에게 설명하며, 이고르는 점점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죽은 뒤 네크로화 까지 이르는 것은, 스스로를 궁극의 파괴 병기로 만드는 것과 같다.
죽음의 개념을 모르는 갓난아기를 제외하면,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살은 결코 혼자 삶을 끝내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타인을 함께 끌고 가는 일이다.
결국 자살은 테러 행위와 다름없다.
“소각장은 어디를 쓰게?”
샘의 질문은 이고르를 몰아붙이는 듯했다.
그 기세를 떨쳐내듯, 이고르는 손목 장치의 전원을 켰고 공중에 지도가 떠올랐다.
“가장 가까운 곳은 북쪽이야.”
두 사람의 위치와 함께 시체 소각장이 지도에 나타났다. 그것을 들여다본 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경로엔 놈들이 배회하고 있어. 다른 곳은 안 돼?”
“시간이 없어.”
이고르는 샘의 제안을 잘라냈다. 이 모든 건 시신 발견이 늦은 탓이다.
“그럼 여기서 태우는 게 더 안전하겠지.”
“이 근처에서 태울 순 없어. 카이랄리움이 도시에 피해를 줄 거야.”
이고르는 뒤편의 도시를 돌아봤다. 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시체의 끝자락, 즉 '놈들'이 몰려 있는 루트를 돌파하기보단, 지금 여기서 시신을 태우는 편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태운 시신에서 퍼져나오는 카이랄리움은 오랫동안 이곳에 남아 생존자들에게 악영향을 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도시의 입구다.
결국 이곳은 폐쇄될 것이고, 도시와 외부를 잇는 소중한 연결선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 같은 능력자가 동행해 주었으면 해”
이고르의 간청에 대한 대답으로, 샘은 말없이 장갑을 벗고 시신 가방에 맨손을 댔다.
손등에서 손목까지의 피부가 붉게 변색되고, 모든 모공이 닫혀 갔다.
이것이 바로 능력자가 죽음을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아마도 슈트 속에 가려진 팔 역시 소름이 돋고, 붉은빛이 도는 어둠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샘은 손을 떼고 얼굴을 시신 가방 가까이 들이댔다.
시체가 내뿜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다.
이마 중앙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네크로화의 초기 단계야. 서둘러야 해. 안 그러면 여기가 날아가.”
즉,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샘, 같이 가줄 수 있겠나.”
시체 위에 몸을 기댔던 샘은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고르는 다시 한 번 오른손을 내밀었다.
“브리지스와의 계약 성립이다. 샘 포터 브리지스.”
하지만 샘은 그 손을 흘끗 보기만 한 채, 다시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죽은 자에겐 손을 댈 수 있어도, 산 자와의 악수는 할 수 없는 걸까.
이고르는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냥 샘이야. 샘이라 불러.”
샘은 시신을 고정하는 벨트를 다시 조이기 시작했다.
이고르도 무릎을 꿇고 그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난 놈들이 보이지 않아. 느껴질 뿐이야.”
샘은 시체의 발목을 고정한 뒤, 조용히 되뇌듯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그것도 자료에 명시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나 같은 인간은 감지조차 할 수 없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접속해주는 장비 없이는,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고르는 자신의 가슴에 부착된 장비를 툭 치며 샘에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걸 데려왔지.”
“브리지 베이비(BB) 군.”
“너와 얘만 있으면, 놈들을 잘 피할 수 있을 거야.”
절반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다.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이고르는 자신의 복부에서 나온 케이블을 들고 포드의 단자에 연결했다.
순간, 세계가 뒤집혔다.
미저골에서 정수리까지 뜨거운 덩어리가 솟구쳤다.
시야가 이상하게 뒤틀려 보이는 건, 흘러나온 눈물 탓이었다.
샘의 얼굴이 마치 추상화처럼 뒤틀려 보였다.
그 누구도 그 원리나 기원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장비.
이 세계가 지금 같은 모습이 된 즈음에 탄생한 시스템.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아기, 브리지 베이비의 형상을 한,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비.
브리지 베이비가 이고르의 가슴 포드 안에서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포드를 채운 인공 양수 속에서 기포가 터지고 퍼졌다.
“기분 좋은 체험은 아니군.”
눈물을 닦고 콧물을 들이마시며 샘을 바라봤다.
“그래, 저승과 연결되는 거니까.”
샘의 말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오감이 아직 제대로 동기화되지 않은 탓이었다.
시야도 아직 불안정했다. 눈을 감고 눈꺼풀을 비볐다.
귓속 어딘가에서 브리지 베이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그 웃음소리에 반응해 눈을 뜬 이고르의 시야에, 굳은 표정의 샘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가슴의 포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브리지 베이비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출발해!”
이고르는 운전석 쪽으로 외쳤다.
남은 시간은 이제 거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시신을, 이 세계의 규칙에 따라 정확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시신을 죽은 자들의 세계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모터가 빠르게 회전하며, 트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역 게이트를 빠져나가자, 그 너머 하늘엔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짙은 먹구름이 이고르와 샘, 그리고 화물칸의 시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 단말기를 켜고, 이고르는 트럭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안심할 순 없지만, 이대로 간다면 간신히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땐, 세상이 이렇진 않았어.”
화물칸 기둥을 붙잡고 이고르는 샘에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라도 말하지 않으면 불안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있었고, 누구나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지. 너 같은 '배달부'는 없었어.”
샘은 멀리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고르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고속도로도 있었고, 비행기도 떴지. 다른 나라로도 갈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전부 박살났어. 데스 스트랜딩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투성이가 됐고, 운 좋게 남은 것들도 타임폴 덕분에 다 녹아버렸지.”
고속도로, 비행기, 외국, 그리고 아메리카.
단어들은 남아 있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던 실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앞으로는, 말조차도 사라질 것이다.
사물이 사라지고, 그 뒤를 따라 말도 사라진다.
색의 이름, 동물의 이름, 음식의 이름, 탈것의 이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며 생겨나는 감정의 이름들까지… 점점 사라져 간다.
운 좋게 남아있더라도, 그것들은 이제 현실감 없는 성스러운 껍데기일 뿐이겠지. 예컨대 ‘신’처럼.
지금의 아메리카는 거의 신과 같은 말이 되어가고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샘처럼 아메리카가 사라진 뒤에 태어난 세대가 다수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메리카는 신과 똑같다. 이름만 남고, 나머진 신앙의 영역이 된다.
광신으로 변질된 국가는, 무의미한 비극만을 낳게 될 것이다.
그래서야말로, 아메리카를 아는 우리가 그걸 되찾아야 한다.
아메리카가 신이 되기 전에. 타임폴이 전부 녹여버리기 전에. 괴물들이 이 세상을 지워버리기 전에.
“아메리카가 녹아버린 자리에, 해변에서 괴물이 올라왔지. 너한텐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고르는 후회하며 샘을 바라봤다.
그러나 샘의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이고르의 말문을 풀게 했다.
“이 세상은 이제 저승과 연결돼 있어.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시 안에 틀어박혔지. 그래서 너 같은 '배달부'들이 귀한 거야.”
‘나 같은 시체 처리반도 그렇고 말이지──’라는 말은 삼켜버렸다.
아니,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앞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으니까.
땅에서 하늘로 뻗은 게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거꾸로 내려오는 아치. 거꾸로 뒤집힌 무지개였다.
저승에서 괴물들이 건너오는 불길한 다리.
“저걸 봐!”
이고르가 뒤집힌 무지개를 가리켰다. 샘도 이미 눈치챘는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시선은 트럭 적재함의 시신 자루로 향했다. 이고르도 따라갔다.
무딘 납빛의 시신 자루 곳곳에서, 검은 타르처럼 끈적한 액체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특히 커다란 얼룩이 진 부위는 시체의 아랫배 쪽이었다. 이고르의 귓가에서 BB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또다시 시야가 뒤틀렸다. 커다란 검은 반점에서 수많은 미세한 입자들이 태어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입자들은 각각 나선형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었고, 그것들이 서로 꼬여 하나의 굵은 밧줄을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육체가 네크로화하면서, 그곳에서 빠져나온 혼이 해변으로 끌려가려 하고 있었다.
해변은 죽은 자의 세계와 살아 있는 자의 세계를 이어주는 장소를 뜻한다.
단, 그것은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위상 속에 존재하는 특수한 '장소'로 설명된다.
이고르 같은 일반인은 감지조차 불가능하지만, 능력자는 이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설명할 때 종종 죽은 자의 세계를 '바다'로 비유하고,
그 바다와 이 세상을 잇는 장소를 '비치, 즉 해변이'라 표현했기에, '해변'라는 명칭이 굳어졌다.
생명의 근원이라 여겨지던 바다는, 이제 죽은 자들이 돌아가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죽은 자가 비치를 거쳐 이 세계로 밀려드는 현상은
'죽음의 좌초, 데스 스트랜딩'이라 불리게 되었다.
샘이 시신 위에 손을 내밀었다. 밧줄이 생겨나고 있는 아랫배──정확히 배꼽 부위에 손이 닿는다.
손등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한다.
“소각장까지 얼마나 남았지?”
샘이 외쳤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시신 자루는 거의 전면이 검게 물든 얼룩으로 덮여 있다.
그 검은색에 반응하듯, 하늘도 점점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곧 튀어나올 거야!”
“어쩔 수 없군. 놈들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
이고르는 리어윈도우를 두드리며 운전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트럭은 속도를 높이며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적재함의 기둥을 다시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그로 인해 시신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네크로시스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신을 운반해왔지만,
대부분은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던, 비교적 안전한 시신들이었다.
말기 치료를 받던 환자를 격리병동에서 옮기는 일이 많았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라 하더라도, 네크로화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절박한 운반은 처음이었다.
이 자루 아래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육체는 이미 미세한 입자로 끝없이 분해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나마 윤곽을 유지해주는 건, 이 시신 자루 하나뿐.
화학 섬유로 짜인 부드러운 관.
그 결속이 풀리는 순간, 이건 더 이상 시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트럭이 크게 튀어 오르자, 이고르와 샘은 기둥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뒤쪽에서 대지를 휘젓는 바람이 불어오며 적재함의 두 사람을 덮쳤다.
날아든 모래 먼지에 눈을 감은 이고르의 뺨 위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피부가 당긴다. 아픔도, 가려움도 아닌 이상한 감각이 얼굴 전체로 퍼져간다.
또 나이를 먹은 걸까. 흰머리와 주름이 다시 늘었을 것이다.
내리기 시작한 타임폴에 반응해, 유니폼의 후드가 자동으로 펼쳐지며 이고르의 머리를 덮었다.
마주 선 샘 역시 머리에 후드를 쓴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장비를 비웃듯, 타임폴은 점점 거세졌다.
(20/203)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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